Sunday, August 4, 2013

지성찬 '백마에서 온 편지'

백마에 오시려면 전철 타고 오시구려
무악재 쉬어 넘어 구파발서 기다리면
회정역 꽃길을 따라 꽃 구름이 필 겁니다.

구름 속 백마들이 바람처럼 내달리면
천리를 뛰어도 좋을 동화 속의 들이 있고
바람은 첫 손님에게 매달리며 안기리다.

춘삼월 오실 때에 흰 샤쓰를 걸치시면
진달래 붉은 입술을 꼭꼭 찍어 드리리다
개나리 고운 금관을 머리에 얹어 주고.

오월이 가기 전에 꼭 한번 오시구려 
무릎 꿇고 들어보면 푸르른 관현악 소리
그것이 시가 되나 봅니다, 푸른 글이 돋습니다.

꽃 하나 피는 것도 기적이요 섭리러니
수많은 꽃이 앓는 계절의 절정에선 
능선도 가만히 내려와 그 자리에 멈춥니다.

경황이 없으시면 일상 옷을 걸치시고
헐거운 풍경 속을 그렇게 걷다 보면 
그 것이, 좀 모자라는 것이 넉넉하게 보입니다.

비가 와도 괜찮아요, 촉촉히 젖어 와도 
그저 님을 그리듯이 세상사에 젖다 보면
두고 간 발자욱마다 삶의 맛이 고입니다.

마음이 구름처럼 흘러가고 싶을 때면 
백마에서 말을 타는 그런 꿈도 꾸어 보고 
꿈 같은 얘기하면서 밤도 풀어 보시구려.

큰 강도 이쯤에선 발걸음이 더딥니다
바다가 멀지 않은 노을 빛도 서러워서
한번쯤 눈물을 닦고 흘러가고 있습니다.

세상사 시끄러운 그런 소리 없습니다
요즈음 사람들은 귀가 모두 고장나서
웬만큼 큰 소리 아니면 꿈쩍도 안 합니다.

세월은 물이지요 흘러서 간다지요
모두들 흘러가서 흐를 것이 없다지요
흐르는 그런 것 말고 영원을 만나리다

섣달도 그믐밤은 길이 뵈지 않습니다
별을 보고 걸어가면 넘어지지 않습니다
안개나 자욱한 밤엔 엎드려야 하구요.

밤하늘 겨울새가 불을 끄고 울다 가면
곱게 잠든 꽃가지에 그 울음이 떨어지면
아파서 꽃이 핍니다 먼저 꽃이 핍니다.
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지성찬 2001년